[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 아스팔트 틈에 핀 민들레를 들판으로 옮겨 심는 정치를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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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 아스팔트 틈에 핀 민들레를 들판으로 옮겨 심는 정치를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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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다는 소식이 자꾸만 들린다. 지난해 말부터 또다시 들려온 대형 참사로 인해 사람들이 죽어 나갔고 이후 오랜 시간 사이버 테러를 당하던 배우가 목숨을 접었다. 축산업계에선 문제가 생기면 자동반사적 행정처분이 살殺처분이다. 죽음은 생이 있는 모든 것에 공정하게 나눠진 것이라지만 지금 거론한 것만 생각해 보아도 결코 이 죽음들이 공평하거나 합리적이거나 자연스럽지 않다.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우리나라의 경제적 지위는 개발도상국이었다. 그 후 몇십 년 만에 세월을 압축해 놓은 것마냥 매우 짧은 시간 내에, 지금은 명백히 선진국으로 불린다. 1인당 GDP가 20 ,000만 불을 넘어섰고, 이는 외환위기를 겪고도 단숨에 치고 올라선 지표다. 어떤 점에선 상당한 진전이다. 마라톤 거리를 100미터 평균 속력으로 달려서 결승점에 도달한 것 같은 놀라운 결과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이 이 나라의 급속 성장이 내팽개쳐 버렸던, ‘나중에’로 밀려버렸던 깡그리 무시당하고 죽임당하고 조각나 분쇄되는 수준으로 버려졌던 것들이 성장의 길 주변에 산처럼 쌓여있다. 가끔 그런 모습의 장면이 선명하게 상상될 때가 있다. 죽은 노동자, 죽은 학생들, 죽은 가축들, 죽은 산짐승들, 죽은 길짐승들, 죽은 장애인들, 죽은 노인과 아동들, 죽은 여성들, 죽은 성소수자들, 죽은 지역민들, 죽은 이주노동자들, 죽은, 죽은, 죽은, 아니 죽임을 당한 무수한 생명들.

오늘은 모 국회의원의 강연에 오게 되었다. 그 사람을 지지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이런 자리 자체가 거칠게나마 그의 정책과 인간 됨됨이를 훑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몸이 좋지 않아서 침대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대강 걸쳐 입고 아슬아슬하게 시간에 맞춰 나왔다. 뉴스에서 보지 못한 그 행간을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그는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하며 걸어오는 시간에 아스팔트에 낀, 마르고 언 민들레를 보았다. 시대가 준 상처가 지나치게 깊어서 기대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일말의 기대가 접히지는 않았다. 지독한 참사의 세월을 겪으면서도 희망이라는 것은 무섭게 싹을 틔우곤 했다. 희망조차 버리면 편안할 것 같은데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내 희망은 저 민들레처럼 바스러지기 쉬운 것처럼 보이면서도 끈질긴 것이기도 했다. 이 나라는 계엄 여파가 여전히 강력하고 제주도만 해도 강정에서 평화를 주장하는 것이 불손하게 다뤄지고 전국은 주말마다 각종 시위로 가득하다. 노동자들은 자꾸만 고공에서 농성할 수밖에 없는 현실로 내몰린다. 집안에서 이불 돌돌 말아 따뜻하게 있어도 쉽게 추워지는 이 날씨에, 하필이면 2월 중순이 넘어가는데도 한파의 기세가 높기만 이 기후에, 이전부터 1년이 넘도록 혹은 이번에 다시, 구미에서 서울에서 고공농성을 한다고 소식이 전해지는 이 나라 현실에서, 그렇기에 더 정치인의 생목소리가 더 궁금했던 것 같다.

어쩌면 다행히도 그는 대단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강정에 대해, 군사기지화 되고 있는 현실과 그에 저항하는 이들에 대해 위치한 지점이 조금 유사하다는 것만으로도 일면은 안심했던 것 같다. 물론 현실에서는 지척이라도 큰 차이로 다른 선택의 길로 갈 수 있다. 그는 정치인이고 행정가이고 국회의원이다. 그가 선택할 부분은 매우 계산된 어떤 지점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바라보는 관점과 시야가 다르면 같은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방법은 분명히 차이가 난다. 그는 내 입장에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이야기도 했지만 적어도, 계발 운운을 하는 온갖 정치인들의 말 속에서 강정에서 왜 저항하는지에 대해 공감하며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은 드물어서, 조금 의외였던 것 같다.

강연이 끝나고 잠시 자리에 머물며 생각했다. 계엄 이후, 대형 참사 이후, 자꾸만 자살로 내몰리는 사람들의 세상을 넘어, 인간들의 온갖 이기적 계발로 살처분당하는 비인간동물들 너머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두렵고 떨리는 무수한 사건들을 보고서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처럼 혹은 마음속이 구멍이 크게 뚫린 것처럼 공허한 시간을 보내면서,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는 문제는 ‘죽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해고는 죽음이다.” 경영상의 이유를 들먹이며, 온갖 치졸한 이유를 들먹이며 회사를 위해 어쩔 수 없는 구조조정이니 그럴싸한 명분으로 노동자를 해고할 때, 매번 그 희생은 노동자가 도맡아야 할 때, 우리가 함께 외치는 구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벌어먹을 길을 막아버리는 것은 죽으라는 말과 진배없다. 고속 성장을 해서 선진국이 된 나라에서, 자본주의가 인정한 제일 잘사는 나라에서, 고작 이 땅의 수많은 생명에게 나눠주는 것이 죽음의 발판이라면 이 성장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되물을 수밖에 없다. 이는 수많은 참사와 죽음과 살처분의 이유가 선명해지는 단적인 원인이다.

다시 처음 도입부에 쓴 죽음들을 떠올려 본다. 그 죽음들에 대해 각계 전문가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내고 있다. 고통스럽거나 조심스럽게 애도하는 목소리로 사위가 가득 찬다. 그런데도 정치인들에게 만약 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듣고도 무시한다면 그는 정치인이 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 단언한다. 무수한 죽음들의 이유를 살피고 이 죽음의 근거들을 축소화하는 것에 관심을 보이는 정치인을 만나고 싶다. 성장을 위한다며 내몰아내어 죽음 그 가까이로 몰고 간, 성장의 고속도로 갓길에 쌓인 시체들을 분석하고 애도하며 어떻게든 이 시체들이 줄어들 수 있는 합리적이며 명확해서 현실에 굳게 뿌리내릴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려 애쓰는 사람들이 일상을 일구고 정치를 하고 경영했으면 좋겠다. 나라를 지킨다는 게 대단한 명분이나 비장한 무언가에 있다고만 생각한다면 주변부터 둘러봤으면 한다. 곁의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는 이 현실만큼 대단하고 비장하고 중요한 일이 있겠는가. <<한정선 / 소수자 활동가 및 작가>

[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은...

한정선 / 소수자 활동가 및 작가 ⓒ헤드라인제주
한정선 / 소수자 활동가 및 작가 ⓒ헤드라인제주

'작은 사람'이란 사회적약자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구조적 차별의 위치에서 벗어나기 힘든 여성, 노인, 아동, 청소년, 빈곤,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더 나아가 동물권까지 우리나라에서 비장애 성인 남성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다수 구조적 차별과 배제의 현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부장제 하의 남성은 '맨박스'로 괴롭고 여성은 '여성혐오'로 고통을 받습니다. 빈곤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침범하여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공장식 축산은 살아 있는 생명을 사물화하고 나아가 단일 경작 단일 재배 등을 통해 기후위기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사회적약자의 소수자성이 교차될수록 더욱 삶이 지난해지고 그 개별화된 고통의 강도는 커집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제가 겪고 바라본 대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때로는 우울하게,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다양한 언어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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