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릴 적 유년의 기억에서 여름은 항상 참외 향기와 장대비 소리로 남아있다. 더우기 여름방학이 되면 형제들이 모여 앉아 엄마가 부쳐주는 빈대떡을 먹으며 들었던 빗소리는 가끔 그리움의 대상으로 아직도 마음 한켠에 머물어 있다. 사계절이 뚜렷한 내 조국, 한국의 여름은 그랬다.
그런 탓인지 언제부터인가 여름은 비와 연관되서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다. 뉴욕에서도 며칠 반짝 덥다가 비라도 한바탕 내려주면 길거리 뿐 아니라 몸과 마음 조차 정화되는 느낌을 받곤한다. 비 오는 날, 우산을 함께 쓰고 가는 연인들의 뒷모습을 보면 왠지 눈시울이 뜨거울 정도로 아련한 아픔이 느껴진다. 자동차 문화가 발달하면서 눈이 오면 걱정부터 앞서지만 비가 오면 공기부터 상쾌해진다. 클래식 음악 중에도 비와 연관된 곡이 있을까, 의외로 많이 있다.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3곡 중 1번에는 ‘비의 노래’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또한 한 여름의 찬둥 번개까지 자세히 묘사한 비발디의 여름이나 드뷔시의 모음곡 ‘판화’ 중 세번째 곡 ‘비오는 정원’도 비를 묘사한 곡이라 할 수 있다. 아담한 서재나 책방에 앉아 비가 떨어지는 모습을 무심코 바라볼 때의 모습에서는 잔잔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바로 그런 음악이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이다. 쇼팽은 생전에 24곡의 전주곡을 작곡했고 빗방울 전주곡은 15번째 곡이다. 빗방울이란 부제는 쇼팽이 붙인 게 아니고 그 당시 평론가였던 한스 폰 벨로에 의해 붙여지게 되었다. 곡을 들으면 누구라도 알게 되는 음률이 있다. 톡톡 빗방울이 낙숫물 떨어지듯 규칙적인 왼손 음률에 맞춰서 오른 손은 메인 멜로디를 부르고 있다. 어찌 들으면 구슬프고 또 어찌 들으면 영롱하고 맑은 나뭇잎 위의 빗방울 소리같다. 그리고 청량하고 시원한 초록의 내음이 물신 풍기는 곡이다.
이 곡에는 사연이 있다. 쇼팽을 이야기 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여인이 조르즈상드다. 평소에 쇼팽과 리스트는 단짝같은 사이였고 어느 날 쇼팽은 리스트의 권유로 한 파티에 참석해 그 곳에서 6세 연상의 여류소설가 조르즈상드를 소개받는다. 그 후 이 둘은 연인 사이로 발전하고 마침내 지중해의 섬 마요르카로 여행을 떠난다. 흔히 보면 밀월여행 같지만 사실 그 당시 쇼팽은 폐결핵을 앓고 있었고 이 여행은 요양차 가는 여행이었다. 어느 날, 조르즈상드가 외출하고 비가 들퍼붓고 있었다. 저녁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연인, 조르즈상드를 걱정하면서 한편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연인을 생각하면서 작곡한 곡이다. 그래서인지 이 곡에는 다분히 사랑, 연모의 감정과 함께 혹시나 혼자 남게 될 수도 있는 외로움과 고독의 감정까지 함께 담고 있다.
흔히 전주곡이라 하면 본곡의 도입부에 짧게 연주하는 곡인데 낭만주의 시대에 와서는 전주곡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특히 쇼팽의 24개의 전주곡은 본인 말대로 평소에 쇼팽이 존경하던 바흐의 전주곡과 푸가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섬세하고 다분히 여성적인 면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쇼팽과 시가를 입에 물고 누구에게도 지지않는 당당함을 가졌던 남성적인 상드, 쇼팽은 마지막까지 예술적 동반자로 남길 원했지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연인관계는 훗날 상드의 자서전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화산같은 에너지를 가진 상드는 온 힘을 다해서 쇼팽을 극진히 간호했고 그 덕에 쇼팽은 그동안 준비해 왔던 24개의 전주곡, 폴로네이즈 4번, 스케르초 3번, 마주르카 등 많은 곡을 이곳, 마요르카 섬에서 만들었다. 사랑의 힘이 얼마나 많은 창작의 불을 피웠는지 후대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현재 우리에게까지 남아있는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느깔 수 있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의 유려하고 서정적인 빗방울전주곡을 들어보시라. 그리고 그가 느꼈던 사랑과아울러 곡의 뒷편으로 가면서 느껴지는 두려움을 함께 음미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정은실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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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실 칼럼니스트는...
서울출생. 1986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감.
2005년 수필 '보통 사람의 삶'으로 문학저널 수필부문 등단.
2020년 단편소설 '사랑법 개론'으로 미주한국소설가협회 신인상수상
-저서:
2015년 1월 '뉴요커 정은실의 클래식과 에세이의 만남' 출간.
2019년 6월 '정은실의 영화 속 클래식 산책' 출간
-컬럼:
뉴욕일보에 '정은실의 클래식이 들리네' 컬럼 2년 게재
뉴욕일보에 '정은실의 영화 속 클래식' 컬럼 1년 게재
'정은실의 테마가 있는 여행스케치' 컬럼2년 게재
'정은실의 스토리가 있는 고전음악감상' 게재 중
퀸즈식물원 이사, 퀸즈 YWCA 강사, 미동부한인문인협회회원,미주한국소설가협회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소설가협회회원, KALA 회원
뉴욕일보 고정 컬럼니스트
명해설을 보고 듣는 빗소리 전주곡, 더욱 영롱하게 여울지는 피아노 소리가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