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 참혹한 세상에 내리는, 가뭄에 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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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 참혹한 세상에 내리는, 가뭄에 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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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령을 넘어올 때만 해도 무너진 세상이 재건 되는 것처럼 보였다. 응원봉을 들고 밀려오는 2030 여성들, 장애인들, 성소수자들, 이주민, 농민, 노동자들의 힘찬 함성과 끊임없이 부르는 <다시 만난 세계>를 보고 들으며 권력자들이 이기적인 욕심으로 부서뜨린 우리의 세상을 우리는 혐오를 박살 내고, 이전보다 더 다채롭게 아름답게, 빛과 노래로 큰 물결을 이룬 것을 보며 벅차올랐다. 12월 초 시작된 국가 폭력 내란죄인과 내란 동조자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어도, 차별받고 멸시받고 “나중에”로 밀려나야 했던 수많은 존재가 자신의 정체성을 외치며 “우리가 여기에 있다”라고 존재 자체로 말했다 연대가 몰려오는 이 귀중한 시간으로 인해, 함께 평등한 꿈을 꾸고 희망을 품어도 되는 것 아닌가 하고, 마른 땅에 싹이 돋는 것처럼 기대를 키웠다.

시위하고 있지만 축제 같았다. 맨주먹을 힘차게 뻗어 투쟁을 외치기도 하지만 K팝에 맞춰 노래하며 춤도 추면서 우리는 마치 해일처럼 밀어서 용산에 도착했다. 몇 주간 일상이 박살 난 사람들이 오랜만에 단잠도 자고 식사도 하고 더 단단해지고 더 많이 연결된 마음들이 서로를 지켜나가고 있었다. 분명히 그랬다, 우리는 분명히 그랬다. 남태령에 몰려갔던 2030여성들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지하철 이동권 투쟁에 몰려갔고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농성 현장에 2리터(ℓ) 생수가 3천 병 넘게 모였다. 전태일의료센터는 후원자가 몰려 홈페이지 접속 장애가 걸릴 정도였다. 여성농민들이 운영하는 언니네텃밭도 마찬가지였다. 시위 현장에 넘치는 먹거리 핫팩 생리대 릴레이 선결제 후원들이 있었다. 남태령 역사는 추위와 시위에 지친 시민들이 쉴 수 있게 따뜻하고 안락한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기에 느닷없이 들려온 아침 뉴스, 항공기 참사 소식은 돋아난 싹을 짓밟아 뭉개는 것처럼 충격적이었다. 뉴스를 들으며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제발 한 사람이라도 더 구조되길 바랐지만 처음 우연히 구조된 승무원 두 명을 제외하고는 179명 전원 사망했다. 분석과 억측과 온갖 가짜뉴스와 저주받을 막말이 뒤엉켰다. 사람들은 최근까지 일어난 참사들을 떠올리고는 몸서리쳤다. 요 십여 년을 훑어도 참사 사이 기간이 너무 짧다. 직원이었던 사람들이 SNS에 쓴 강도 높은 노동 현장 관련 글들이 오르내리는 중에, 제주항공의 살인적 스케줄이 공개됐다. 보도 경쟁으로 과열된 언론은 인권에 대한 개념을 내다 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이 모든 것에 차근차근 상처받고 있었다. 검으로만 사람을 베는 게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내던 세상은 잠시 멈추고 다시, 추악하고 더러운 세상 현실이 가시 돋은 채찍을 휘두르는 것 같았다. 마음에 돋아났던 싹은 정성스럽게도 즈려밟혀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졌다.

먹지도 못하고 잠들지도 못하고 반은 정신을 놓은 것처럼, 꾸역꾸역 먹고사니즘의 일상을 살아내고 있었다. 슬픔은 시간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다음날이었을까, 친구가 전해준 뉴스 한 토막에 넋이 나간 듯 살던 시간이 원래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달려가서 밥을 짓고 나누고 있었다.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낸 사람들을 먹이고 재우고 있었다. 후원 물품이 다시 무안으로 가고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간 물만 먹어도 토기가 쏠리던 시간이었다. 며칠을 제대로 먹지 못했던 터라 이젠 먹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지만, 재생되는 시간을 제대로 살아내기 위해 김밥을 나눠 먹었던 기사처럼 김밥을 먹었다. 체하지 않으려 꼭꼭 씹어 먹으면서, 이 참혹한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는 힘에 대해서 또 생각했다.

좋아하는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있다. “세상은 잔혹하다, 그런데도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가사는 “너를 지켜내겠다.”이다. 세상은 잔혹하다에 멈춰서 꼼짝 못 하는 나약한 나는, 그래도 사랑하고 지켜내는 사람들의 강함에 그저 압도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압도된 마음은 감동으로 이어진다. 움직이는 마음은 움직이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시간만이 아니라 나 역시 재생하기 시작했다.

‘가뭄에 단비’라는 말이 있다. 지독하다 말하기 힘든 세월 속에 싹을 틔운 존재들에게는 이 단비 한 방울로 생존을 잇기도 한다. 도살장에 끌려온 돼지와 닭들에게 활동가들이 건네던 물 한 방울에서부터 동짓날 남태령에 고립됐던 농민들에게 몰려갔던 시민들, 고통받는 곳곳에 보내던 후원금들, 죽음으로 잠식당하던 현장으로 달려가 먹이던 사람들은, 분명 가뭄의 단비였다. 그걸 바라보는 나는 매번 그 한 방울 튄 물방울로 구원받았던 것을 깨달았다.

세밑 이토록 잔혹한 세상 소식 아래에 차갑게 울고 있는 사람들이, 가려져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상상을 넘어서서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악랄한 정부 내란수괴와 그 동조자들은 오늘도 뻔뻔하게 굳건하다. 따순 집에서 따순 밥 먹으며 입에 담을 수 없는 언행을 하고 있다. 이 간극이 너무 거대해서, 그 크기만큼 감당하기 힘든 12월의 두 참극을 지나오느라, 이 지나친 슬픔으로 지쳤을 이 땅의 모든 존재들에게 부디, 가뭄의 단비 같은 축복이 내리길. 근본적으로 체제가 변혁될 단비의 시작이길. 해서 정말로, 가장 낮은 곳에 처한 생명부터 새해엔 복을 많이 아주 많이 받길. 받은 복을 나눌 수 있길. <한정선 / 소수자 활동가 및 작가>

[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은...

한정선 / 소수자 활동가 및 작가 ⓒ헤드라인제주
한정선 / 소수자 활동가 및 작가 ⓒ헤드라인제주

'작은 사람'이란 사회적약자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구조적 차별의 위치에서 벗어나기 힘든 여성, 노인, 아동, 청소년, 빈곤,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더 나아가 동물권까지 우리나라에서 비장애 성인 남성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다수 구조적 차별과 배제의 현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부장제 하의 남성은 '맨박스'로 괴롭고 여성은 '여성혐오'로 고통을 받습니다. 빈곤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침범하여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공장식 축산은 살아 있는 생명을 사물화하고 나아가 단일 경작 단일 재배 등을 통해 기후위기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사회적약자의 소수자성이 교차될수록 더욱 삶이 지난해지고 그 개별화된 고통의 강도는 커집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제가 겪고 바라본 대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때로는 우울하게,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다양한 언어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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