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도덕과 양심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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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도덕과 양심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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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 폐지 줍는 노인의 빈곤 현장을 보며

언젠가 무척이나 더운 여름이었다. 마침, 육지의 남쪽 도시, 큰 도로 사거리, 정오의 시간, 모자도 선글라스도 양산도 없이 그대로 그 볕의 뜨거움을 고스란히 받으며, 아스팔트에서 치고 올라와 형체마저 휘어지게 할 듯한 열기에, 사방이 비었으나 어디에도 도망갈 곳 없는 여름에 갇혀 휘청거리다 숨 막히는 압박감에 인상을 쓰며 사방이 차도인 교통섬에서 횡단보도 초록불을 기다리고 있던 시간, 그 짧은 몇 분에도 무더위에 쩔쩔매며 내심 투덜거렸다. 햇살이 지나치게 눈부셔서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문득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바라보았다. 서 있는 곳 오른편 차도에서, 멈출 것처럼 느리게 아주 천천히 끌리는 소리를 내며, 수레가 다가와 마침내 멈추었다.

커다란 수레가 있었고 수레 크기의 높이만큼 온갖 폐지가 쌓여 있었다. 위태로워 보이는데도 묘한 균형감에 아슬아슬하게 쌓인 폐지 탑은 긴 끈 몇 개로 간신히 묶여 고정돼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수레 자체의 높이 정도의 키밖에 안 될 것처럼 작고 마르고 헐벗은 할머니. 수레와 폐지로 이뤄진 조형물의 거대함에 가려, 수레를 허리의 힘과 팔의 힘과 다리의 힘과 끌고 오느라 넘어질 듯 손잡이 조금 앞으로 굽혀진 상체가, 곁으로 다가올 때처럼 느리게 시선을 끌었다. 인도가 아닌 넓은 차도 한 가운데를 지나와 횡단보도를 지나가려 여전히 차도에서, 차가 아닌 사람이, 차가 아닌 거대한 수레와 더 거대한 폐지를 끌고, 떼어내어서 상상할 수 없는 풍경으로, 위태롭게 흔들리는 양의 수레 더미와 느닷없이 차가 들이받아도 놀랍지 않을 만큼 광활한 차도의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놀랍게도 균형을 잡고 있는 이 풍경이 그다지 낯설지가 않아서, 경악과 경이로움이 동시에 몰려왔다. 할머니를 바라보다 수레의 짐을 바라보다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해 헤매다 이내 무섭고 슬퍼져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아주 길게 늘어진 것 같았으나 고작 몇십초의 시간이 지나갔다. 다시 느리게 영원히 시작되지 않을 것 같은 속도로, 천천히 수레가 움직였다. 말 그대로 나와 할머니가 인접한, 이 섬 같은 공간 옆 차도의 한가운데를 다시 차도 아니면서 움직여 나가고 있었다. 왜 차도로 다니냐며 화를 내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저토록 높고 무겁고 위태로운 수레를 울퉁불퉁한 인도로 끌고 지나가라 하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해 보였다. 한낮이라 시간은 흐르면 흐를수록 단 몇 분 사이에도 더 뜨거워진 것 같은 공간에서, 인내심의 한계를 분당이 아니라 초당으로 재고 있는 초조함으로 짜증이 난 상태에서, 폭발할 것 같은 억울함이 치받아 올라왔다. 이거 뭔가 잘못된 거 아닌가.

저 거대한 폐지 더미를 움직이고 밀고 옮겨 가서 저 작고 마른 노인에게 지불되는 돈은 얼마가 될까. 100kg은 넘고도 남을 무게를, 바퀴를 굴려서 겨우 옮겨간 노인에게 얼마만큼의 돈이 지불될까. 2025년 3월 현재, 신문지 1kg을 팔면 125.1원을, 골판지 1kg은 80원이라고 한다. 간단하게 계산하기 위해 평균 폐짓값을 1kg당 100원이라 치자. 100kg이라 해도 10,000원이다. 고작 10,000원이다. 그러니 처음 움직일 때 수레를 뒤에서 밀어주면 조금 수월하겠지만 내가 동정적이고 즉흥적으로 움직인 마음이 과연 그의 삶에서 덜 퍽퍽해질 수 있는 무언가로 작동할 수 있을까, 땀을 흘리며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햇살이 눈 부셔 잔뜩 찡그린 얼굴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니오였다.

사람의 온정적 손길 한 번에 위로를 받는 이야기는 언제나 따듯하게 포장되어 회자한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마음이 움직이고 마음이 움직임과 동시에 이미 행동하고 있는 다정한 사람들의 일화는, 일종의 신파라 하면 극도로 꺼리는 나조차도, 일상 속 실천적 다정함에 온기를 느끼곤 한다. 실천하는 사람들은 한 사람에게만 그럴 리도 거의 없을 테고 내어주고 나누며 이 지독한 사회구조 틈바구니에서 고통받는 이들에게 잠시 숨 돌릴 여유라도 건네려는, 박애적 심정아 님일까 싶었다. 그런데도 그것을 보며 근본적으로 아니라고 대답하곤 했다.

며칠 전 폐지에 물을 부어 무게를 더 늘리려 하는, 폐지 줍는 사람들에 대해 대화가 오간 걸 기억한다. 그때 나는 강풀 작가의 만화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떠올렸다. 노동의 강도와 시간에 비해 말도 안 되게 책정된 폐짓값이 과연 공정한가가 생각하며 다시 이내 슬퍼졌다. 공정하지 않은 폐짓값은 힘없고 가난하고 조직화 되지 못해 더 고립된 노인 빈곤층에게 빚어진 비극적 현실을 결과적으로 반영하기도 하지만, 힘없고 가난하고 조직화 되지 못해 섬처럼 고립된 노인 빈곤층의 폐짓값 따위엔 정치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그럴 때 이 만화에서, 폐지의 가격을 높게 책정해 주기 위해서, 일부러 물을 뿌려주는 사람들의 모습은 불법적이면서도 공정하지 못하다는 생각 외면하고 낭만적이면서 다정하게, 물을 뿌릴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만들어 낸 게 무엇인가에 대해 오히려 질문하는 듯 보였다. 따라서 기계적 공정성은 이 불법적 온정성 앞에서 무참히 패배했다.

그러니 비합리적이고 반인권적인 폐지 수거 현장 노동자들이 그 폐지에 물을 뿌리는 것에 격노하며 공정의 잣대를 들이대고 비도덕적이라 결론을 내린다면, 차별적 현실을 외면해서 이룩된 당신의 안온한 삶은 과연 공정하고 도덕적인가 반문하고 싶어졌다. 고작 100원도 안 되는 가격을 높이기 위해 양심을 파는 인간들이라 판단하는 이들, 그 100원 얼마나 끔찍할 만큼 간절한 삶을 살아본 적 없는 자들의 편리하고 쾌적한 일상은 얼마나 계층적인가. 그런 그들이 때가 되면 자원봉사를 하고 기부를 하는, 나름 착한 일상은 얼마나 시혜적인가.

폐지를 집채처럼 쌓지 않아도 되고, 폐짓값이 생계를 유지하는 데 비참함을 강요당하지 않아도 되고, 폐지에 물을 뿌리며 양심 어쩌고 따위를 논하지 않아도 되고, 빈곤의 현장이 단 하나의 장면으로도 증명되지 않아도 되고, 사소한 폐지 한 장 가격에도 공정성이 정확히 인권에 기반해서 책정되고, 빈곤한 노인을 두고 도덕성 따위를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레 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 훔친 빵에 대한 과도한 처벌에 분노할 수 있는 우아한 품격을 지닌 사람들이 빈곤한 노인이 폐지에 물을 뿌려 얻게 되는 몇백 원의 이득에 쌍심지를 켜고 바라보지 않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분노는 물을 뿌리는 쪽이 아니라, 철저히 불공정하여 빈곤의 악순환 레벨 만렙을 찍은 결과물인, 폐짓값에 쏟아부었으면 좋겠다. <한정선 / 소수자 활동가 및 작가>

[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은...

한정선 / 소수자 활동가 및 작가 ⓒ헤드라인제주
한정선 / 소수자 활동가 및 작가 ⓒ헤드라인제주

'작은 사람'이란 사회적약자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구조적 차별의 위치에서 벗어나기 힘든 여성, 노인, 아동, 청소년, 빈곤,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더 나아가 동물권까지 우리나라에서 비장애 성인 남성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다수 구조적 차별과 배제의 현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부장제 하의 남성은 '맨박스'로 괴롭고 여성은 '여성혐오'로 고통을 받습니다. 빈곤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침범하여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공장식 축산은 살아 있는 생명을 사물화하고 나아가 단일 경작 단일 재배 등을 통해 기후위기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사회적약자의 소수자성이 교차될수록 더욱 삶이 지난해지고 그 개별화된 고통의 강도는 커집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제가 겪고 바라본 대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때로는 우울하게,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다양한 언어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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