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 (11) 세한지우, 동백꽃이 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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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 (11) 세한지우, 동백꽃이 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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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속에 핀 동백꽃. 사진=배공순
눈 속에 핀 동백꽃. 사진=배공순

동백꽃 여행을 떠났다. 동그란 나이테가 육십 개를 막 그리던 해였다. 친구들과 함께 할 첫 답사지는 오동도. “오동추야 달이 밝아 오동동이냐.”라며 엄마가 가끔 흥얼거리시던 노래 속 오동동이 오동도일까, 하는 궁금증은 그대로였다. 몇 번 갔던 곳이지만 처음인 양 들뜬 기분으로 여수에 발을 디뎠다. 양쪽으로 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방파제를 걸어 섬으로 향했다. 오동도는 예전부터 바닷가 늘 푸른 동백숲과 팔색조 서식지로 유명한 곳이다. 울울창창한 숲은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무수히 매단 꽃망울을 축포처럼 터트리고 있었다. 숲에 드니 사방이 동백이었고, 바다색 하늘을 배경으로 반짝거리는 푸른 잎에 대비되어선지 동백꽃은 유독 붉디붉었다.

마음조차 불그레해진 우리는 정남진 장흥으로 길을 잡았다. 남녘의 명산 천관산은 자생 동백이 군락을 이루는 곳이다. 숲길이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숲의 광활함이 시원스럽다. 동백꽃은 토종인지 유난히 작아 오종종하다. 오동도 동백숲에선 꽃과 눈을 맞추며 나뭇잎 사이를 메우는 하늘을 볼 수 있다면, 이곳은 길 위에서 우거진 숲을 관상하기에 좋다. 붉은 꽃이 많이도 피었건만 이파리에 숨어 수줍은 아씨처럼 부끄럼을 탄다. 바람에 검푸른 숲이 굼실거리자, 동백꽃은 붉은 입술을 오므린 채 덩달아 흔들릴 뿐 말이 없다.

꽃 욕심 바구니가 아직은 헐렁하여 광양 옥룡사지 ⃰ 동백숲으로 내달았다. 초입부터 붉은 동백꽃이 풍성하게 피어 반겼다. 오르락내리락 오솔길 따라 숲 안으로 들자, 고목이 된 굵은 둥치는 의연했고 꽃은 더욱 탐스러웠다. 뚝뚝 떨어져 누운 꽃들이 길에도, 숲에도 꽃밭을 만들어 두었다. 하늘바라기로 누운 꽃들은 새색시 입술인 양 선홍으로 붉었다. 지극히 고운데도 이우는 청춘 같아 애련해지는 건 왜일까. 육십 개의 동백꽃을 모아 하트를 그려놓고, 농익은 향기로 미래의 여백을 채우고픈 마음을 담아두었다.

〈동백포레스트〉의 애기동백 숲. 사진=배공순
〈동백포레스트〉의 애기동백 숲. 사진=배공순

어느 해, 애기동백을 보고 싶어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후배와 함께 제주살이하는 후배와 합류했다. 많은 전통가옥이 남아있는 고즈넉한 바닷가 어촌, 김녕 어느 정겨운 촌집에서의 하룻밤은 수다로 풍성했다. 졸리는 눈을 비비며 쓸데없는 설전이 오갔다. “얘들아, 오동동이 아마 오동도일걸.” 후배들은 “언니, 아닐걸.” 하며 몇 번을 주고받다 알아보니 오동추야의 오동동은 마산시 오동동의 술집 거리란다. “이런, 흐흐흐 하하하.” 어이없어 웃다 보니, 희부윰한 새벽빛이 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골목으로 나섰다. 엊저녁 달빛 아래 산책하던 조용한 마을은 여린 햇살에 해맑았다. 올레 끄트머리 바닷가에 서자 호기심을 자극하는 구조물이 보였다. ‘청굴물’이란다. 검은 돌로 쌓은 나지막한 원형의 우물 옹벽이 바닷물에 씻기는 모습이 청신했다.

청굴물은 깊은 바다 밑으로 흐르던 용천수가 솟아 나오는 곳이다. 생활용수로 썼지만, 만조에 물이 그득해지면 마을 사람들은 노천탕으로도 사용했다. 구조는 남녀를 구분한 커다란 욕조 같다고 할까, 차갑기로 유명한 냉탕이라 지병이 낫는다는 말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데, 지금은 ‘풍경 맛집’이 되어 인생 사진을 남기려는 이들이 줄을 잇는 성싶다,

드디어 애기동백 숲을 만날 시간, 언제봐도 좋은 제주 풍광을 즐기며 천천히 달린다. 입구에서부터 힘을 돋게 하는 진초록 구름 같은 뭉치들, 훤칠한 동백나무 우듬지가 보인다. 보고 싶었던 애기동백의 명소 동백 포레스트다. 동백꽃 액자랄까, 숲을 배경으로 난 창 앞에는 추억을 찍으려는 젊은이들 줄이 길다. 그 틈에 낄까 말까 하다 옥상에 오르니 포레스트 전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봉싯봉싯 줄지어 선 나무들 군집에서 나는 오름을 불러온다. 동백숲으로 들어선다. 온통 동백, 동백, 동백…. 분홍동백이 꽃 잔치를 열고 있다. 나무 밑에는 분홍 카펫이 폭신하게 깔렸고 하늘은 티 없이 푸르다. 진분홍 꽃잎과 노랑 꽃심, 싱그럽게 빛나는 초록 잎새가 어우러진 별세계는 고요하고 아늑하다. 자박자박 꽃길을 걷다 보니, 아름다운 순간을 함께 한다는 진득한 우정에 살이 오른다. 동백숲은 그런 곳이었다.

여기저기 꽃 자랑이 시드는 겨울이면, 이윽고 동백이 나서 설경을 꽃으로 물들인다. 순백의 눈 속에 핀 붉은 꽃은 더없이 고혹적이다. 예부터 추운 겨울을 더불어 나는 송·죽·매를 세한삼우 歲寒三友라 일렀는데, 동백을 가리켜 세한지우 歲寒之友라 했던 건 왜일까. 찬 바람 눈밭 속에 홀로 붉은 동백을 힘들 때 지켜주는 심지 깊은 벗에 빗대 ‘겨울 친구’라 했으리라.

〈동백포레스트〉의 애기동백꽃. 사진=배공순
〈동백포레스트〉의 애기동백꽃. 사진=배공순

세한삼우가 있어 오래도록 동행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리 쉽지 않은 일. 정원에서 자라는 꽃들도 저마다의 성질에 맞춰 가꾸듯, 각기 다른 교유의 생김새를 보듬어 지혜롭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다독여야 하리라. 아름다운 우정이란 그저 주어지는 게 아니어서 배려와 존중의 후박 厚薄에 그 농도가 배어나는 것이려니. 벗의 행복을 온전히 기뻐하는 친구, 벼랑 끝에 선 친구에게 든든한 지지대가 되어 주는 벗, 나는 그런 친구를 가졌을까. 아니, 과연 나는 그런 벗일까, 되밟아보며 눈밭을 밝히는 동백의 꽃말 ‘변치 않는 사랑’을 품은 세한지우를 꿈꾼다.

화사한 동백꽃은 단아하고 고귀한 기품을 풍긴다. 폭설과 칼바람에도 제 모습을 흩트리지 않으면서 때에 이르면 미련도 없이 “툭, 툭” 놓아버리는 그 단호함이라니. 생각해 보면, 겨울에서 봄을 향해 피는 꽃이 동백 아니던가. 그렇기에 동백꽃은 움트는 생명과 새로운 시작의 희망을 전하는 메신저가 아닐까 싶다. 너나없이 많은 일을 겪으며 보내는 올해도 저물어간다. 가는 것은 가는 대로 고이 보내고, 이제 동녘을 물들일 여명을 오롯이 기다려야 하리라.

얼마 전부터 주중에는 고창에서 지낸다. 이곳은 ‘설창’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서해안에 접해 겨울이면 함박눈이 소복소복 내리곤 해서 얻은 별명이다. 눈발이 오락가락하는 요즘, 고창읍성 안 바지런한 동백은 붉은 꽃을 피워내는 중이다. 눈 속에 피어 강렬한 꽃, 추위를 겪어야만 더 곱다는 동백꽃이 시나브로 피어나고 있다.

나는 벌써 선운사 동백을 볼 요량으로 시간을 보챈다. 대웅전 뒤 병풍처럼 둘러선 거대한 동백숲에 붉게, 붉게 동백꽃이 피고 동백의 세한지우, 동박새가 꽃 사이를 오가며 노래하는 청아한 소리를 듣고 싶다.

선운사 골째기로/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읍디다/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읍디다

미당未堂의 〈선운사 동구〉를 읊으며 선운사 동백이 어서, 고운 꽃잎을 열기를 기다린다.

⃰옥룡사지 광양 백운산에 있던 옥룡사는 통일신라 말의 뛰어난 고승이자 한국풍수지리의 대가인 국사 도선이 35년간 머무르면서 수백 명의 제자를 가르치다 입적한 곳으로, 우리나라 불교 역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천년 불교 성지임. 지금은 터만 남았고, 도선이 땅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심었다는 7천여 그루의 동백나무숲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됨.

김녕 청굴물. 사진=배공순

 

수필가 배공순

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는...

나만의 소박한 정원을 가꾸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깊은 사유로 주변을 바라보고,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보태려 했던 것은, 문화재와 어우러지는 봉사활동이었다. 창경궁을 둥지 삼아 ‘우리 궁궐 지킴이’로 간간이 활동 중이다.

이곳저곳을 둘레둘레, 자박자박 쏘다닌다. 제주도 예외는 아니어서 올레를 걷고 오름에 오르기를 좋아한다. 사색의 오솔길을 오가며 사람 내 나는 이야기, 문화재나 자연 풍광, 처처 다른 그 매력을 소소하게 나누고 싶어 글을 쓴다.

<약력>

2016년《수필과비평》등단, 한국수필문학진흥회원, 제주《수필오디세이》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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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24-12-23 17:02:56 | 222.***.***.58
우와, 동백이 참 이쁘네요. 친구들과 동백꽃 여행을 한다는 건 특이하고 멋집니다.
나도 한번 친구들을 모아 꽃여행을 하고 싶어요.
세한지우라는 말도 새롭고, 잘 읽었습니다.

여행좋아 2024-12-23 17:05:24 | 222.***.***.58
참 재미나게 생활하시는 것 같아요.
글이 재밌어서 술술 일었네요.

아, 오동동이 실제 있다는 것 , 이제 알았어요~~

영아 2024-12-24 09:21:16 | 222.***.***.58
동백꽃 이쁜 곳을 많이 가셨네요. 제주는 너무 예뻐서 한번 가보고 싶어요.
여기는 서천인데요. 이곳 동백숲도 유명해요. 400년 넘은 빨간 동백꽃이 장관이지요.
재밌는 이야기 감사합니다.

오름지기 2025-01-12 09:46:37 | 14.***.***.63
눈 속에 동백꽃이라~~ 생각만해도 참 예쁘네요.
쏠쏠하게 읽혀지는 글, 언제나 기다녀집니다.

몬딱 2025-01-13 12:42:04 | 115.***.***.113
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제주도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제주에서 20년 가까이 살다가 떠난 지 1년 반쯤 되었는데, 벌써 그 기억이 희미해지네요. 덕분에 좋은 기억을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