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랏빛 해국이 엎드린 풀과 어우러져 바람을 탄다. 글씨조차 걸어갈 듯 유려하게 쓴 표지석을 지나 송악산 둘레길에 접어든다. 억새는 서그럭서그럭 하얀 웃음을 날리는데, 앞서서니 뒤서거니 북촌 대감들은 걷다 멈추기를 반복한다. 그림 같은 경치를 둘러보며 유유자적 즐기는 눈치다. 투명하고 짙푸른 하늘은 바다에 맞닿아 있고 파도는 절벽에 몸을 던지며 구애의 노래를 쉬지 않는다. 운여雲礖,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포말이 만들어내는 모습이 마치 구름과 같다’는 그 장대한 풍경이 이런 것일까.
송악산은 크고 작은 아흔아홉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오름이다. 홀로 봉긋한 여느 오름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런데다 세계적으로 드문 ‘이중 화산체’여서, 화산이 분출한 후 그 속에서 또다시 폭발하는 바람에 굼부리가 두 개인 것도 독특하다. 깊숙한 분화구 속에는 검붉은 화산재가 남아 있다니 장구한 세월을 견디는 자연의 힘이 경이롭다.
유려한 한라산의 실루엣을 배경으로 산방산이 불끈 솟아있다. 그 품에 보듬고 있는 명물은 두고라도 종이랄까, 벙거지랄까 생김부터 걸출하다. 해돋이가 장관인 성산일출봉과 외모 순위를 매겨보지만, 저마다의 매력이 출중해 내 얕은 미감으로는 답을 낼 수 없다. 헌데 순위가 무슨 소용인가, 눈 앞에 펼쳐지는 시원스러운 풍광을 누리면 될 일을.

인연이 있던 창덕궁 옆 북촌 대감들과 제주 탐방에 나섰다. 갈까 말까 망설이던 나를 비행기에 들이밀다시피 한 동행이었지만,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데는 몇 시간 걸리지 않았다. 대감들의 활기 충만함으로 친구나 가족과는 또 다른 여행이었다. 제주를 좋아해 구석구석 탐방했던 데다 미식가들이어서 다양한 맛 기행으로 풍요로웠다.
오르락내리락 오솔길을 걷다 보니 담소 끝에 옛 추억이 불려 나온다. 종로구청에 근무하던 때로 여섯 개 동을 선정, 세 개로 통합하는 일을 진행하던 때였다. 삼청동과 가회동 또한 대상이어서 지역 리더들을 설득하며 여론조성을 해나갔다. 동명은 삼청동으로 하되, 통합 후 남는 가회동 청사에는 주민들이 원하던 편의시설을 설치한다는 것이 주된 협상안이었다. 설명회를 열었으나 심한 반대와 마주해야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통합 자체에는 동의하는 쪽으로 조금씩 기울면서도 동 이름부터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상대방의 양보만을 바랄 뿐. 북촌 대감들은 협상안에 동의한 분들로 주민 설득 과정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을 함께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가결을 눈앞에 두었으나, 삼청동에 흡수되어 유서 깊은 가회동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는 일부의 여론몰이로 결렬되고 말았다. 여론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닌데도, 불붙은 논점은 진실 여부를 상관하지 않았다. 동 통합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북촌 대감들과는 끈끈한 우정으로 이어졌고, 이제 송악의 오솔길에서 흘러간 후일담에 “허허허” 웃는다.
솜사탕 같은 하얀 억새가 바람에 맞서 함께 눕고 함께 일어선다. 왁자하게 웃으며 모퉁이를 돌아서자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전집이 반긴다. 대감들은 그 집으로 나를 앞세운다. 색바랜 나무 탁자에 둘러앉아 쭈그러진 노란색 잔에 “콜,콜,콜” 막걸리를 채워 든다. 파전이 나오기를 기다려 바람에 휘휘 저어 마시는 막걸리 한잔이 여행길에 즐거움을 더한다.
다시, 숲길을 지나고 평평한 풀밭을 질러 송악의 깊숙한 품으로 든다. 이곳의 다른 이름은 ‘절울이오름’이다. 제주어로 ‘절’은 ‘파도’요 ‘울’은 ‘울다’는 뜻, 파도가 절벽을 두드리며 울고 있다니 마침 맞은 이름이다. 파도는 뭍을 향해 달려오는데 저만치 은물결은 부서지는 햇살에 간지럼을 탄다. 우뚝한 단애를 끼고 걷는 둘레길은 앞을 보아도 뒤를 돌아보아도 숨 막힐 듯 아름답다.


풍경은 이리 아름답건만, 해안 절벽에는 일본군이 파놓은 동굴이 여럿이다. 일제강점기의 쓰라린 생채기다. 엄혹한 시절을 증거 하듯, 지난날의 아픈 역사를 말없이 보여준다. 시커먼 아가리를 벌린 동굴은 소형 잠수정을 숨겨두던 진지였다. 미군 함대가 접근하면, 어뢰를 싣고 돌진해 자폭하기 위한 용도였던 것.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미쳐 날뛰던 일제는 본토로 향하는 미군을 상대하기 위한 결사 항쟁의 장소로 제주를 택해 요새화하기에 혈안이 되었다. 대표적인 곳이 송악산 일대라니 쪽빛으로 멍든 바다가 절벽을 향해 내달으며 울부짖지 않고서야 무슨 수로 버텼겠는가.
헛헛한 마음을 다독이며 ‘부남코지’로 오른다. 짙푸른 태평양의 넉넉함과 국토 최남단 마라도와 가파도가 잡힐 듯 보이는 탁 트인 풍광을 잠시 누린다. 제주어로 ‘부남’은 바람이 많이 부는 것을, ‘코지’는 바다로 돌출된 부분을 가리킨다. 거친 바닷바람에 억겁을 견딘 장엄한 코지 풍경이 볼수록 장관이다. 여기까지의 풍경도 황홀하지만, 곳곳에 숨어있을 송악산의 매력이 궁금해 완주하기로 한다. 가파른 구간을 오르며 가쁜 숨을 몰아쉬긴 해도 절경을 누리는 대가에 비하면 수고로움은 미미할 뿐이다.
햇살에 빛나는 갈잎과 함께 걸은 탐방로. 한 바퀴를 돌고도 아쉬움이 남아 언젠가 굼부리에 내려가 보리라는 미련 하나를 남겨둔다. 영혼을 맑게 하는 둘레길이었으나, 송악의 속살이 품고 있는 상흔을 보며 ‘나라’는 연년세세 정의롭고 강한 힘을 가져야 함을 뜨겁게 생각한다. 그 힘으로 그 안에 깃든 ‘사람’들을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나라가 진 무한의 책무가 아닌가.
송악산의 모든 것. 바다, 섬, 단애, 바람, 파도, 나무, 꽃, 오솔길, 그리고 햇살, 저마다 타고난 대로 존재하지만, 이들은 서로 돕는 공생의 세계를 이루며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살아간다. 둘레길에 서서 이들이 합주하는 대자연의 환상곡을 오롯이 품는다. 혹여 낭만적인 그 합주를 듣고 싶거든 송악산 둘레길로 가보시라. 사방팔방 아름다운 경치 속에 웅대한 그 환상곡은 여전히 흐를 터이니….


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는...
나만의 소박한 정원을 가꾸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깊은 사유로 주변을 바라보고,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보태려 했던 것은, 문화재와 어우러지는 봉사활동이었다. 창경궁을 둥지 삼아 ‘우리 궁궐 지킴이’로 간간이 활동 중이다.
이곳저곳을 둘레둘레, 자박자박 쏘다닌다. 제주도 예외는 아니어서 올레를 걷고 오름에 오르기를 좋아한다. 사색의 오솔길을 오가며 사람 내 나는 이야기, 문화재나 자연 풍광, 처처 다른 그 매력을 소소하게 나누고 싶어 글을 쓴다.
<약력>
2016년《수필과비평》등단, 한국수필문학진흥회원, 제주《수필오디세이》회원
예전에 가보았던 섭지코지만 있는줄 알았는데
부남코지도 있다는걸 글을 통해 알았네요.
배작가님 잘봤습니다.
다음 글도 기다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