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고안 '생태적 가치', 시민기획단 제안 무시...무늬만 '들불축제'
목축문화 상징 콘텐츠 완전 사라지고...'디지털 쇼' '민속경기대회'로
간부공무원 회의서 돌연 일방적 계획 변경...'시민참여 기반 축제' 무색

제주들불축제가 주최기관인 제주시의 갈팡질팡 행보 속에 정체성이 사라진 축제로 전락했다. 제주 목축문화와 방애를 상징하는 마지막 남은 콘텐츠마저 대안도 없이 폐기하면서 '들불축제'의 전통은 완전히 사라지고, 명맥마저 끊기게 됐다.
대신 '디지털 쇼'와 '읍.면.동 대항 민속경기대회'가 축제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얼핏보면, 디지털 빛축제인지, 아니면 도민체전의 민속부문 대회인지 분간이 힘들다. 사실상 들불축제는 폐지되고, 전혀 다른 성격의 새로운 콘텐츠 축제가 신설된 셈이다.
일련의 과정을 보면 크게 두 가지 차원의 문제가 제기된다. 하나는 변경 과정의 절차적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의미가 사라진 축제의 내용적 문제이다.
◇ 숙의형 원탁토론...시민기획단 논의 기본계획...왜 갑자기 변경?
첫 번째, 절차적 논란에서는 민주적 논의 과정없이 일방적으로 기본계획을 변경한 점이 도마에 오른다. 축제의 핵심적 내용을 변경하는 과정이 전적으로 '관(官)' 주도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지난 2년 여간 시민 원탁회의의 숙의형 토론 및 시민기획단의 축제콘텐츠 발굴, 콘텐츠 전국 공모 등이 진행됐지만, 공들인 보람도 일순간 모두 허사가 됐다.
그간 '2025년 들불축제'의 계획 입안 과정을 보면, 지난 해 6월 발표된 '2025 들불축제'의 기본계획'이 그나마 정당성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계획을 만들어가는 하나하나가 시민 논의구조를 통해 이뤄졌기 때문이다.
제주들불축제의 재설계는 2023년 시작됐다. 그해 3월 열릴 예정이던 들불축제가 전국적으로 불어닥친 산불위기 상황으로 인해 축제의 하이라이트였던 '오름 불놓기'가 페지되면서 전면 개선 필요성이 대두됐다. 오름 불놓기 때신 각종 공연 및 줄다리기, 듬돌들기 등과 같은 경연 프로그램을 진행햇으나 '불'이 빠진 '반쪽 프로그램'으로 축제의 의미를 강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문제는 '불' 없는 들불축제가 작년이 처음이 아니라 종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나타날 수 있다는데 있었다. 1997년 처음 축제가 시작된 후 산불위험과 강풍, 코로나19 등으로 축제가 취소되거나 연기된 사례는 8차례에 이른다. 이중 3번은 '불' 없는 축제로 진행됐다.
여기에 기후 변화시대 탄소중립 정책과 맞지 않은 축제라는 점도 개선 필요성을 더했다.
제주시가 2023년 축제가 끝난 후, 숙의형 원탁회의를 구성해 축제 개선방향에 대해 공론에 부친 것도 이 때문이다. 그해 9월 원탁회의 운영위원회는 축제 개선방향에 대한 권고안을 제시했다.

제주시는 이 권고안을 수용해 '시민참여 기반.생태가치 지향 축제'라는 새로운 방식의 축제를 설계해 추진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2024년 들불축제는 개최하지 않고, 준비 과정을 거쳐 2025년 새로운 축제를 열겠다는 내용이다.
2024년 2월에는 공개모집을 통해 다양한 연령층 시민 96명으로 '시민기획단'을 꾸려 새로운 콘텐츠 개발 및 기획 논의를 진행했다.
이 과정을 통해 지난해 6월 2025년 들불축제 기본계획이 발표됐다. 오름 불놓기는 폐지하고, 빛과 조명 등으로 새별오름을 수놓아 불을 형상화하는 미디어아트 방식으로 진행한다는 것이 주 내용이다. 축제의 전통을 잇기 위해 제주 목축문화와 방애를 상징하는 '불'을 테마로 한 횃불대행진과 달집태우기 등은 그대로 유지한다고 했다.
이후 축제 콘테츠를 확정하기 위한 전국 공모 등이 진행됐다.



그러나 올해들어 절차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지난 1월13일 발표된 축제의 수정계획에서는 기본계획의 기조는 대체적으로 유지하면서도, 특정인 예술공연 부분을 전면에 배치하는 형태로 강조해 의아스러움을 샀다.
그리고, 축제 개막을 불과 20여일 앞둔 이달 20일, 제주시 당국은 또 다시 계획을 변경했다. 축제의 정통성을 담은 콘텐츠 중 유일하게 남아있던 '달집 태우기'와 '횃불 대행진' 마저도 폐지하기로 한 것이다. 축제의 원래의 의미는 완전히 사라지고, '빛과 조명'의 디지털 쇼와 같은 전혀 다른 성격의 축제로 변모한 것이다.
그동안 축제계획 발표 자료에서는 시민기획단 논의 결과와 전국 콘텐츠 공모, 자문단 의견 수렴 등 검토 과정을 거쳤다는 부분을 강조해 왔으나, 이번에는 이런 내용 마저도 쏙 빠졌다.
◇ 제주시 "간부회의 논의통해 변경"...2년간 진행 시민 논의는 '허사'?
문제는 막바지 계획 변경이 제주시의 일방적 결정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종전 시민 공론화 과정의 내용이나 시민기획단 검토 과정은 완전히 무시된 것이다.
제주시 관광부서는 변경 이유에 대해, "올해 1월 13일 축제 일정 및 세부계획 발표 후에 여러 의견들이 있었는데, 2월14일 제주시장 주재 간부회의를 통해 축제 전반에 대해 논의했고, 2월17일 국장과 부서장이 참여하는 추진상황 보고회에서 변경을 최종 결정했다"고 밝혔다.
들불축제는 제주시에서 주최.주관하는 축제여서 계획 수립이나 실행은 관광축제추진협의회 심의 안건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축제 결정권한은 제주시가 갖고 있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주장이다.
막바지 제주시의 일방적 결정에, 지난 2년 간 진행돼 온 숙의형 토론 및 원탁회의 운영위원회, 그리고 시민기획단, 콘텐츠 전국 공모 등의 절차는 모두 허사가 된 것이나, 이에 대해 단 한 마디 언급도 없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당국의 태도도 모호하다. 지난해 11월 제주도의회에 ‘정월대보름 들불축제 지원에 관한 조례'에 대한 재의요구서를 하면서, 재의요구 사유 중 하나로 '도지사 권한 침해'를 든 바 있다. '제주도 축제 육성 및 지원에 관한 조례' 제3조의 규정에 따라 지역 축제의 명칭과 개최 시기, 장소 등은 축제육성위원회를 통해 결정하도록 돼 있는데, 도의회에서 제정한 조례는 명칭과 시기, 장소를 강제하면서 도지사 권한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제주도의 논리대로라면, 들불축제의 핵심 콘텐츠를 폐지하는 등의 계획 변경도 위원회 심의대상이 된다. 축제육성조례 제3조에서는 축제 명칭 뿐만 아니라 '축제 발전전략' 등도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제주시의 이번 계획변경은 절차적 정당성에 상당한 의문을 갖게 하다. 원탁회의 운영위원회가 권고안을 통해 우려했던 ‘관 주도 추진’, ‘보여주기식 축제 기획’에 다름 아니다.
◇ 정체성.의미 사라진 축제...'디지털쇼' '읍면동 대항 민속경기대회'로?
두번째, 내용적 측면에서도 논란이 크다. 축제의 정체성, 의미가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원탁회의 운영위 권고안의 핵심은 '시민참여 기반, 생태가치 지향 축제'였다. 이를 바탕으로 한 지난해 기본계획에서는 들불축제의 전통의 맥은 잇되 '생태적 가치에 부합하는 전환'이 핵심이었다. 4억원을 들여 진행한 용역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포함됐다.
그러나 이번에 최종 변경된 계획은 이도저도 아닌 계획이 되고 말았다. '생태의 가치'는 축제의 기조에서 빠졌다.
축제의 전통성 유지 차원에서 존치하기로 했던 '달집태우기'와 '횃불대행진'도 돌연 폐지했다. 종전 '오름불놓기'와 더불어 3대 핵심 프로그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달집은 높이 5m의 디지털 달집으로 대체해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면서 달집 앞에 설치된 소원판(키오스크)에 작성한 소원을 디지털 달집에 바로 송출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소원지 대신 키오스크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횃불대행진은 기존 등유, 파라핀을 사용한 횃불 대신 LED 횃불로 변경됐다.
'탄소중립과 기후환경 위기'라는 점을 감안해 변경했다고 밝히고 있으나, 대안도 없이 전통성의 명맥을 자른 것이다. 그러면서도 대량의 화약이 사용되는 불꽃쇼는 눈치를 보며 쉽사리 폐지를 못하는 모습은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축제가 임박한 시점에서 바뀐 일정별 프로그램을 보면, 이게 과연 들불축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어색함이 가득하다. 차라리 '디지털 쇼'라고 하든, '읍.면.동 대항 민속경기대회'라고 명명했으면 나을 법했다. 무늬만 '들불축제', 껍데기만 남아있는 꼴이다.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하지만, 최소한 시민들에게 물어보는 과정은 거쳤어야 했다. 축제 전통성과 관련된 콘텐츠의 폐지라면, 그에 상응한 대체 콘텐츠라도 발굴했어야 했다. 단순히 '불'을 디지털 형상으로 바꾼 것을 놓고 대단한 대전환을 한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시민들을 기만하는 말장난에 다름없다.
분명한 것은 축제 계획 변경과정에서 시민은 철저히 무시됐고, 권고안에서 제시한 '시민참여 기반'의 축제 지향 의미는 완전히 훼손됐다는 점이다. 시민이 아니라 '관 주도 축제'가 된 것이다. '생태가치 지향 축제'라는 권고안도 무색하게 다가온다. 패착의 자충수가 아닐 수 없다.
3월 14일부터 16일까지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 새별오름 일대에서 열리는 축제, 정말 들불축제가 맞긴 하나. <헤드라인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