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산다는 게 부질없을 때가 온다. 부질없음은, 관성으로 버티는 삶의 주변을, 공회전하다가 느닷없이 침범한다. 방어조차 할 수 없게 예상치 못한 침범은 때론 폭력적일 만큼 강력하거나 때론 천천히 색이 물들 듯 잠식해 온다. 정신을 차리면 삶은 이미 점령 완료 상태일 때도 있다. 부질없음은 부질없음으로 인해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겨우 키워낸 내 생의 이끼 정도의 푸르름마저도 빼앗아 간다. 부질없음이 삶을 침범해 오면 이미 내부에서 공존 중이던 무기력이 발동하고 속도를 따라갈 수 없게 온몸으로 증식한다. 마침내 나거기에 먹혀버린다.
언젠가 내 책을 읽고 평생 우울증을 겪어본 적이 없어서 알 수 없는 경험이라 낯설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부러웠던가. 아마도 질투가 날 만큼 부러웠던 것 같다. 그런 삶이 가능하다니, 우울로만 세상을 받아들이고 해석해 오던 거의 평생의 삶에서 그것이 걷힌 상태로 세상과 마주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나는 매우 기쁠 때조차도, 매우 아름다운 것을 보거나 사랑스러운 것을 마주할 때조차도 거기에서 슬픔을 읽어내곤 했다. 찬란하게 아름다운 풍경과 마주하면, 아….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는 마음이, 가슴을 훅 그으며 찰랑거렸다. 아래에서 위로 찬찬히 차오르는 슬픔은 그 속도에 맞춰 상처를 남긴다. 고통을 멈출 방법을 몰라서 망연히 있다 보면 베어진 순서대로 무너지는 자신을 관망할 뿐이다.
가을이 오면 사람들은 꽃과는 달리 꽃처럼 아름다운 단풍들을 찬양하고 단풍놀이를 간다. 아름다운 것들에 매혹당하며 기꺼이 즐거운 한때를 만끽하고 아쉬워한다. 겨울이 오면 흩날리는 눈이라든가 눈 쌓인 높은 산의 풍경이라든가 거칠게 파랑 치는 바다 정경이라든가 이런 것들로 경외와 겸허를 장작불처럼 지핀다. 겨울에만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하며 추위 속에서도 웃고 떠들며 행복한 시절을 만들어간다. 멀리서 바라보면 이 모든 현상이 곱고 정답고 따스해서 슬며시 미소 짓게 만들어 준다. 그래, 만들어 준다, 다만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라도. 우울을 겪지 못해 이해불가능을 말하는 이의 고백만큼이나 저 풍요로운 일상이 부럽지만 질투보다는 아련함을 남긴다. 어쩌면 나도 겪을 수 있었을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하며 부러워하고 그런데도 이런 모습을 눈에 담고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는 생이라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울 장애를 겪는 많은 이들은 이렇듯 아름다운 계절 속에서 쉽게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급격하게 줄어드는 일조량만으로도 사람은 살아갈 수 없게 하는 거대한 힘과 마주하게 된다. 우울증은 있다가도 없고 어떡하다 보면 사라지는 우울감과는 다르다. 지독하게 따라붙다가 마침내 자신과 우울을 떼어놓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까지, 그것이 모든 감정을 빼앗아 가고 무(無)에 이를 때까지 착실하게 사람에게 작동한다. 모든 것은 멈췄는데 작동하는 것은 우울뿐이다. 우울은 아주 활기찰 만큼이나 열심히 침범하고 점령하고 작동한다. 적어도 조금이라도 나아져서, 조금이라도 세상에서 말하는 ‘일상적’ 사람 비슷한 것이라도 돼보려 했던 모든 것들이 부서진다. 그간 애써서 버텨냈으나 해소되지 못한 상처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거대한 둑을 이루고 있던 것들이, 일조량의 감소 하나가 시초가 되어 산산이 무너진다. 중압감이 큰 상처의 무게만큼이나 어이없이 작은 간극만으로도, 완전히 내려앉는다. 부질없음은 이때를 놓치지 않는다. 패배한 사람은 부질없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항복.
패배한 사람은, 부질없음을 받아들이고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어려운 무기력 속에서 도대체 살아야할 이유조차 찾지 못하면서, 그저 질식할 것 같은 감각만 관조하며 멈춘다. 모든 것은 멈춘다. 감정은 지나간 날의 일이고 오늘의 사건조차 기억은 흐트러진다. 오직 호흡만이 삶이 유지되고 있음을 인지하지만, 그마저도 그만두고 싶은 충동을 간혹 느낀다. 다만 멈춘다. 지역 사회의 복지, 의료, 시민사회 등에서 개입하고 적극적 지원해 보려 해도 어려워지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우울은, 무기력은, 부질없음은 개인을 지독하게 고립시키고 고립에서만 쓸쓸한 안온함을 느끼기에 도움을 요청할 에너지도, 이유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신장애인이나 F코드(정신과 치료받은 이력) 사람에게 ‘노력해서 일상을 유지하라, 조금만 걸어라, 규칙적으로 생활하라.’라는 착한 말들이 폭력이 되는 건 순식간이다. 이토록 지난한 고통을 멈출 방법을 찾지 못해서 그 탈출구가 오직 죽음밖에 보이지 않는 이에게, 노력이란, 바로 그 길로 가는 것으로만 해석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구 10만 명당 자살하는 사람 수가 25명이라는 슬픈 기록은 OECD 소속 국가, 즉 산업 선진국 집합체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에 해당된다. 10명당 10명을 넘어서게 되면 세계보건기구에서는 이를 ‘전염병’이라고 진단한다고 한다(징 지글러 저, 양영란 역,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시공사)”라는 글을 읽었다. 참담하다.
점염병이 된 자살이 참담해서 고심을 해봐도, 아무리 방법을 찾아봐도 스스로 고립된 사람들에게 연결될 방법은 찾아지지 않고 이 한계가 치명적이어서, 그저 발만 동동 구를 때가 있다. 가끔은 안부를 전하고 가끔 가만히 말들이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가끔은 받지 않는 전화를, 지나치지 않게 -물론 이 기준도 너무나 주관적이라서 어렵다- 꾸준히 기간을 두고 보내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작은 부탁을 해도 될까, 감히.... 당신이 버텨준 생존자들-말 그대로 생존자들이다, 이들이 싸워낸 우울과의 전쟁은 아주 많은 확률로 생존이라는 게 기적에 가깝다고 단언한다-을 다시 마주하면 부탁이니 잠시 가만히 안아주길 바란다. 그게 어려우면 손을 잡아도 좋다. 그게 어려우면 들여다보며 곁에 잠시 있어도 괜찮다. 곁에 있다는 신호가 그들에게 닿길 마음 깊이 집중하면서. 이 작은 순간들이 중첩되고 쌓이고 겹쳐나가 확장되면, 그들은 또 우울에 잠식당하는 날이 오더라도 어쩌면, 그 곁이라는 것을 생각해 낼지도 모른다. 너무 많이 죽어서 우울이 전염병이 된 이 나라에서, 연대라는 게 거창한 것만이 아니라 작고 사소한 마음들의, 순간적이기도 하고 지속적이기도 하고 찰나적이기도 하지만 멈추지 않고 꾸준히 이어지는, 끈끈한 연결이라고 여전히 나는 믿기 때문이다. 믿는다. 믿어야 한다.
[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은...
'작은 사람'이란 사회적약자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구조적 차별의 위치에서 벗어나기 힘든 여성, 노인, 아동, 청소년, 빈곤,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더 나아가 동물권까지 우리나라에서 비장애 성인 남성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다수 구조적 차별과 배제의 현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부장제 하의 남성은 '맨박스'로 괴롭고 여성은 '여성혐오'로 고통을 받습니다. 빈곤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침범하여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공장식 축산은 살아 있는 생명을 사물화하고 나아가 단일 경작 단일 재배 등을 통해 기후위기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사회적약자의 소수자성이 교차될수록 더욱 삶이 지난해지고 그 개별화된 고통의 강도는 커집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제가 겪고 바라본 대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때로는 우울하게,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다양한 언어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