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훈 / 제주대학교 행정학과 박사과정
[전시 개요]
전시명: 이승수 개인전 <가득한 빈>
일시: 2026. 01. 30. ~ 02. 22.
장소: 갤러리애플 (제주시 연북로 399, 2층)
1월의 끝자락, AI의 등장으로 인간 지성에 대한 재정의가 이루어지고, 급변하는 기술이 우리의 일자리를 고민하게 만드는 불안한 시대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만 도태되지 않을 것 같은 강박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가득한 빈’이라는 제목을 내건 전시장이 있다. 갤러리애플의 기획초대전에 나선 조각가 이승수의 개인전이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이하는 것은 시각적 형상이 아닌 청각적 신호였다. "똑딱, 똑딱." 전시장 한 켠, 달항아리를 닮은 원형 오브제에서 들려오는 시계 소리다. 그 규칙적인 박동은 존 케이지(John Cage)가 <4분 33초>에서 침묵을 통해 주변의 소음을 음악으로 치환했듯, 빈 공간을 ‘시간’이라는 보이지 않는 밀도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응축된 에너지, 폭발이 아닌 ‘품음’으로
이번 전시에서 단연 눈길을 끈 것은 전시장 중앙에 위치한 난로 형상의 설치 작품이다. 난로 뚜껑은 핵(Nucleus) 모양을 하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는 불빛이다. 그 점멸하는 빛이야말로 작가가 차마 다 태우지 못하고 안으로 삼킨, 혹은 끝내 지켜내고 있는 뜨거운 ‘열정의 코어(Core)’로 읽힌다. 그 위로 피어오르듯 공중에 매달린 작업실의 도구들은 폭발의 파편이라기보다는, 에너지가 발산되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해 둔 듯한 긴장감과 안정감을 동시에 준다. 9년 전, 작가의 유사한 작업이 날것 그대로의 폭발이었다면, 지금은 그 에너지가 세월을 만나 더 단단하고 원숙하게 응축되었음을 보여준다.
야성(Dionysus)과 이성(Apollo)의 조우
흥미로운 지점은 클래식한 조각상을 연상시키는 작품들이다. 그동안 제주의 거친 자연과 버려진 사물들에 천착해 온 그가 왜 하필 가장 고전적인 주제와 닿아 있을까. 짐작건대, 이는 지난 5년간 대학 강단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겪은 환경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학생들에게 조형의 기초를 가르치며 작가 자신도 모르게 다시금 ‘기본’과 ‘클래식’에 대한 깊은 탐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니체는 예술의 탄생을 설명하며, 도취와 혼돈, 격정적인 생명력을 뜻하는 ‘디오니소스적 충동’과 꿈과 질서, 조형적인 형상을 추구하는 ‘아폴론적 충동’의 결합을 강조했다. 금속을 이용해 만든 작가 특유의 거친 물성(야성)이 가장 완벽한 비례를 가진 클래식한 형상(이성)과 만났을 때, 작품은 비로소 절묘한 조화와 균형점을 찾는다.
가득 찬 비움, 그 위로의 미학
이승수의 작품은 안이 비어 있기에 역설적으로 빛을 가득 담는다. 구조물을 통과한 빛은 벽면에 따뜻하고 은은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 그림자는 어둠이 아니라, 작가가 금속이라는 차가운 물성 뒤에 숨겨둔 또 다른 ‘제3의 공간’이다. 학교에서의 연이은 행정 업무와 회의를 병행하며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치열하게 키워나가는 과정 속에서, 그가 선택한 ‘비워내기’는 현실 도피가 아니다. 그것은 복잡한 소음(Noise)을 제거하고 본질적인 알맹이만 남기려는 성찰의 결과물로 보인다.
불안이 잠식하는 시대, 이승수 작가는 우리에게 말한다. 꽉 쥐고 있는 것을 놓아버린 빈 공간에 비로소 빛이 스며들고, 그 빛이 따뜻한 그림자를 만들어 우리를 감싸 안는다고. 야생의 조각가에서 강단의 교육자로, 그의 손끝은 조금 더 부드러워졌을지 모르나 심장은 여전히 뜨겁다. 차가운 금속과 따뜻한 빛이 만들어낸 이 오묘한 조화 속에서, 관람객들은 잃어버렸던 마음의 균형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김대훈 / 제주대학교 행정학과 박사과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