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는 늘 성과를 말한다.
예산을 얼마나 확보하고 조례를 몇 건 제정했는지, 공약을 얼마나 이행했는지 내세운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도 새로운 정책과 사업을 쏟아내며 저마다 성과를 앞세우기 바쁘다.
하지만 시민의 삶은 여전히 불편하고 무겁다. 정치가 많은 일을 했다고 자부하는데 현실의 어려움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다.
장애인 이동권을 보자. 저상버스와 장애인 콜택시를 늘리는 것은 분명 성과로 부를 수 있다. 하지만 휠체어를 이용하는 시민이 원하는 시간에 병원에 갈 수 없다면 어떨까. 제도가 존재하지만 필요한 순간에 누릴 수 없다면 그 정책은 불완전한 것이다.
여성의 안전도 마찬가지다. CCTV를 늘리고 안심 귀갓길을 조성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정작 그 골목을 걷는 여성이 안전을 체감하고 위급할 때 즉각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가 더 본질이다.
청년 주거 정책 역시 '지원 인원'이라는 숫자로만 평가할 수 없다. 얼마나 많은 청년에게 돈을 지급했느냐보다, 그 지원이 실제 월세 부담을 덜고 팍팍한 삶을 지탱해 주었는지를 살펴야 한다.
의정 활동도 예외일 수 없다. 조례를 많이 발의했다고 주민의 삶이 저절로 나아지지는 않는다. 보행 환경 개선 조례가 제정되었어도 유아차를 끄는 부모가 불법 주정차를 피해 차도로 내려서야 하고, 시각장애인이 점자블록 위 적치물 때문에 위태롭게 돌아가야 한다면 제도와 현실 사이에는 여전히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처럼 정책으로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와 시민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제도는 변화를 위한 출발선일 뿐, 주민의 일상에 닿아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때 비로소 성과라 부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이런 간극이 반복되는 것일까?
미국 작가 개리슨 케일러가 창조한 가상의 마을 '위비곤 호수'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그곳의 여성은 모두 강하고, 남성은 모두 잘생겼으며, 아이들은 예외 없이 평균 이상이다. 현실에서 모두가 평균 이상일 수는 없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장점만을 부풀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위비곤 호수 효과’라 부른다. 운전자의 90% 이상이 자신의 실력이 평균보다 뛰어나다고 믿고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이 타인에 비해 훨씬 정직하고 도덕적이라고 생각한다.
정치도 이 착시에 빠지기 쉽다. 자신이 추진한 정책을 자신이 세운 잣대로만 평가하며 훌륭했다고 자평한다. 위비곤 호수에 갇힌 정치는 ‘내가 잘했다’는 확신에 안주한 채, 시민의 비판을 불편해하고 지난한 노력의 과정만을 앞세운다.
물론 예산을 확보해 사업을 추진하고 그 과정을 투명하게 설명하는 것은 공적 책임이다. 그러나 성과를 ‘설명’하는 일로 성과를 ‘검증’하는 일을 대신할 수는 없다. 예산을 다 썼다고 제대로 썼다고 단언할 수 없고, 민원을 처리했다고 근본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며, 조례를 만들었다고 시민의 권리가 저절로 보장되지는 않는다.
같은 문제가 되풀이된다면 원점부터 다시 물어야 한다. 예산이 부족하거나 집행이 어긋난 것은 아닌지, 아니면 처음부터 시민의 고통을 온전히 헤아리지 못했는지 등을 냉정하게 짚어야 한다. 이때 시민의 쓴소리는 성과를 깎아내리는 공격이 아니라 더 나은 정치를 향한 가장 정확한 나침반이다.
정치가 스스로 자신의 점수를 매겨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요한 것은 정치인 스스로의 잣대가 아니라, 그 판단이 시민의 현실과 일치하느냐다. 정치는 무엇을 해냈는지 나열하는 데 멈추지 말고, 누구의 삶에 온기가 닿았으며 아직도 제도의 문턱 밖으로 밀려난 사람은 누구인지 집요하게 응시해야 한다.
성숙한 정치는 부족함을 인정하고 비판을 수용하며 기꺼이 오류를 고쳐나간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가 아니라, 그 일로 무엇이 달라졌는가. 얼마나 큰 성과를 거뒀는가가 아니라, 아직도 누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
시민의 삶은 정치의 성과를 돋보이게 하는 배경이 아니다. 정치의 유일한 존재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