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느다란 미풍이 스치고 간 봄밤, 창을 통해 흐르는 달빛의 자태는 교교하기 그지없다. 초승달은 초승달 대로 보름달은 보름달 대로 제 몸을 다 내어 놓고 못다한 한이라도 풀려는 여인같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달을 주제로 지은 시나 문학작품 등도 많지만 무엇보다 고전음악에서도 달을 주제로 작곡한 곡들을 여러 편 만날 수 있다. 슈베르트의 가곡 방랑자가 달에게, 슈만의 달밤, 쉔베르크의 아픈 달을 비롯해서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 월광과 드뷔시의 달빛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이 중에서 대중에게 잘 알려진 곡으로는 베토벤의 월광을 들 수 있다. 스위스 루체른 호수에 비친 조각배의 흔들리는 모습에서 이름을 따 온 월광은 베토벤 32곡 피아노소나타 중 비창, 열정과 함께 3대 피아노소나타로 손꼽는다. 누구든 처음의 시작 부분을 들어보면 각자가 만났던 월광을 기억하게 되는 월광소나타는 커머셜이나 영화 속에도 자주 등장하는 음률로 클래식의 진수라 할 수 있는 곡이다. 그러나 오늘 소개하는 드뷔시의 월광은 전혀 다르다. 우선 음률 부터가 생소하다. 그저 눈 감고 음미하는 감미로운 클래식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묘한 끌림이 있다. 한참을 듣다보면 강한 중독성마저 느껴지는 몽환적 아름다움이 깔려있다.
드뷔시는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의 시조로 그에게 영감을 준 인물은 당대의 프랑스 예술 조류를 주도한 상징주의 시인과 인상주의 화가들이었다. 그 중심엔 젊은 예술가들 모임인 ‘화요회’가 있었다. 화요회는 상징주의 시인 말라르메가 자신의 집에서 화요일 저녁마다 열렸던 모임으로 이 모임에는 시인 베를렌, 말라르메, 발레리, 푸루스트 등과 화가 고갱, 마네, 모네 등이 참석해서 열띤 토론을 벌였다. 드뷔시는 이 모임에서 추구하는 상징주의와 인상주의를 그의 음악에 접목시키고 종전에 귀로만 듣는 아름답고 감미로운 음악이 아닌 귀로 듣는 회화로 음악의 지평을 넓혀갔다.
그 즈음 드뷔시는 이탈리아 북부 베르가모로 여행을 떠나고 여행지에서 작곡한 4곡의 모음곡을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으로 명명하게 된다. 이 모음곡에 세번째로 수록된 곡이 바로 달빛이다. 1곡 전주곡, 2곡 미뉴에트, 3곡 달빛, 4곡 파스피에 중에서 세번째 달빛은 시작부터 미끄러진 듯한 선율과 달빛의 확산을 묘사하는 분산화음이 듣는 이들을 몽롱한 꿈속으로 유도하는 느낌이 드는 곡이다. 이 곡의 이름, 달빛은 베를렌의 시집 ‘우아한 축제’ 중에서 ‘하얀 달’속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그대(달빛)의 영혼은 빼어난 풍경화 / 화폭 위를 광대와 탈춤꾼들이 홀리듯이 / 류트를 연주하고 춤추며 지나가지만 / 그들의 가면 뒤로 슬픔이 비치네… / 고요하며 슬프고도 아름다운 달빛 / 달빛은 나무에서 새들을 꿈꾸게 한다.” 드뷔시의 달빛은 원래 피아노 곡으로 작곡한 곡이지만 플륫이나 관현악 등으로 다양하게 편곡되어 연주되는 곡으로 도쿄소나타, 그린 파파야의 향기, 오션스일레븐 등의 영화에 삽입된 곡이다.
자유로운 영혼의 남자 드뷔시에게 가장 먼저 닿았던 세계는 자연이었다. 그는 바람, 빛, 소리 등의 자연을 통해 갇혀있는 세상이 아닌 열려있는 세계를 향해 프랑스음악을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끌어 올렸고 마침내 이 개념은 인상주의 음악의 토대가 되었다. 발레리의 모친이면서 쇼팽의 제자였던 모태부인에게 피아노를 배운 드뷔시는 일찍부터 음악의 천재성을 보이기 시작했고 마침내 로마콩쿨 대상을 탔지만 결국 구속적이고 획일적인 로마유학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2년만에 돌아온다. 일찌기 바그너에 심취했지만 그 역시 구습을 쫓는다고 생각해 화요회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영역을 쌓기 시작한다. 여성편력이 많았던 드뷔시였지만 유독 딸 엠마에 대해서만은 각별한 애정을 보였고 이는 그의 작품 ‘어린이의 세계’에 잘 나타나 있다.
봄의 제전이 펼쳐지는 이즈음, 한 세기를 독특한 자신만의 음악언어로 주도했던 드뷔시의 달빛을 들으며 자신만의 세계로 한번 빠져들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드뷔시의 곡에는 작품번호에 L자가 붙어있다. 이는 드뷔시의 작품을 분류한 음악학자 겸 사서인 프랑스와 레쥬르(Francois Lesure 1923-2001)의 이니셜을 따서 붙이게 되었다. <정은실/ 칼럼니스트>
* 이 글은 <헤드라인제주>와 제휴를 맺은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뉴욕일보>에도 게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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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실 칼럼니스트는...
서울출생. 1986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감.
2005년 수필 '보통 사람의 삶'으로 문학저널 수필부문 등단.
2020년 단편소설 '사랑법 개론'으로 미주한국소설가협회 신인상수상
-저서:
2015년 1월 '뉴요커 정은실의 클래식과 에세이의 만남' 출간.
2019년 6월 '정은실의 영화 속 클래식 산책' 출간
-컬럼:
뉴욕일보에 '정은실의 클래식이 들리네' 컬럼 2년 게재
뉴욕일보에 '정은실의 영화 속 클래식' 컬럼 1년 게재
'정은실의 테마가 있는 여행스케치' 컬럼2년 게재
'정은실의 스토리가 있는 고전음악감상' 게재 중
퀸즈식물원 이사, 퀸즈 YWCA 강사, 미동부한인문인협회회원,미주한국소설가협회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소설가협회회원, KALA 회원
뉴욕일보 고정 컬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