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결혼도 못하고 독신으로 지내며 멀리서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먼 보며 지내던 사람이 있다. 그야말로 플라토닉 러브다. 그나마 이런 경우엔 사랑하는 대상의 실체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만약 바라만 보는 대상이 그림 속의 인물이나 신분상의 문제로 평생 닿을 수 없는 거리의 사람이라면 어떠할까, 과연 이런 그리움이 행복한 그리움일까 생각하다가 보는 사람 입장이 아닌 당사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행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소개하는 라벨은 바로 이런 사람이다.
우리에게 ‘볼레로’라는 춤곡으로 잘 알려진 모리스 라벨은 프랑스 작곡가로 드뷔시와 동시대를 한 곳에서 살았던 프랑스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다. 스페인 국경근처 바스크지방에서 태어난 라벨은 스페인계의 모친 영향으로 스페인에 대한 향수가 많았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도 스페인의 궁정화가 벨라스케스의 그림 ‘마르가리타 테레사’스페인 공주의 초상화를 보고 작곡한 곡이다. 그럼 초상화 속의 마르가리타 공주는 얼마나 예뻤을까 상상하게 된다. 그 당시는 왕족 간에 근친결혼을 많이 했던 시대라 마르가리타 공주 역시 외삼촌인 레오폴드 1세와 어릴 적부터 정혼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합스부르크 왕족의 모습인 주걱턱과 길죽한 얼굴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아주 어릴 적 5세의 그림엔 통통한 모습이었으나 훗날의 초상화에는 어릴 적 모습은 전혀 보이질 않는다. 그럼에도 라벨의 눈에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보였을 것이다. 사랑과 동경과 그리움의 대상이었으므로.
마르가리타 테레사 부부는 서로간에 금슬도 좋았고 문화적인 취미도 비슷했으나 마르가리타 테레사가 네 번째 아이를 출산하면서 그녀의 나이 불과 21세인 1673년에 절명하게 된다. 라벨이 이 곡을 작곡한 것은 1899년이었으니 200년도 훨씬 넘은 때였다. 현존하는 사람도 아니고 이백여년 전의 사람을 사진만 보면서 흠모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 그리고 이를 주제로 명곡을 작곡했다는 사실이 평범한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가 잘 가지 않을 수 있다. 확실히 라벨은 천재성을 가진 예술가임에 틀림없다. 그 당시 라벨은 24세로 파리 음악원에서 가브리엘 포레의 지도를 받고 있었고 훗날 이 피아노 곡이 인기를 얻자 라벨은 1910년에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편곡을 했다. ‘관현악의 마술사’라는 닉네임에 걸맞게 그가 관현악으로 편곡한 이 곡은 원곡인 피아노곡보다 훨씬 더 각광을 받고 있다. 라벨은 당대의 상징주의 문인들, 보들레르, 포우, 말라르메 등과도 교우를 맺고 이는 그의 음악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마침내 미국 재즈음악에도 깊은 관심을 가진 라벨과 재즈의 명인 조지 거쉬인과의 일화는 무척 유명하다.
파반느는 공작새를 의미하는 Pavo’에서 파생된 어휘로 16세기초 스페인에서 시작해 이탈리아에서 유행했던 느린 2박자의 춤곡이다. 공작새가 걸어가는 모습을 연상하면 되듯이 느릿느릿 위엄있고 우아하게 추는 궁정 춤의 일종이다. 파반느는 춤곡의 일종이므로 단순히 라벨만 작곡한 건 아니다. 가브레일 포레나 그외의 여러 작곡가들이 파반느라는 제목으로 작곡을 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라벨의 ‘파반느는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달리한 한 여인, 아마 살아있어도 닿을 수 없는 신분에 있었던 여인, 마르가리타 공주를 위한 파반느이므로 더욱 동경과 그리움이 넘치는 곡이다. 사람은 누구나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애착이 있듯이 라벨도 멀리서 바라만 보는 동경과 그리움이 실제로 만난 것보다 더 사무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죽은 왕녀를 바라보는 라벨을 생각하면서 이 곡을 들어보시라. 특히 관현악버젼은 목관 5중주의 청아한 중성음에 하프와 호른이 겻들인 최고의 곡이다. 누군가를 동경하고 그리워한다는 것, 이 자체가 이미 아름다움의 극치다. <정은실/ 칼럼니스트>
* 이 글은 <헤드라인제주>와 제휴를 맺은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뉴욕일보>에도 게재되어 있습니다.
큐알(QR)코드
정은실의 '알고 듣는' 클래식에서는 음악을 바로 들으실 수 있도록 큐알(QR)코드가 함께 게재
됩니다. 스마트폰의 카메라로 QR코드를 인식하고 화면에 나타나는 주소를 클릭하면 유튜브로 연결되고 플 레이 버튼을 누르면 음악이 재생됩니다.
정은실 칼럼니스트는...
서울출생. 1986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감.
2005년 수필 '보통 사람의 삶'으로 문학저널 수필부문 등단.
2020년 단편소설 '사랑법 개론'으로 미주한국소설가협회 신인상수상
-저서:
2015년 1월 '뉴요커 정은실의 클래식과 에세이의 만남' 출간.
2019년 6월 '정은실의 영화 속 클래식 산책' 출간
-컬럼:
뉴욕일보에 '정은실의 클래식이 들리네' 컬럼 2년 게재
뉴욕일보에 '정은실의 영화 속 클래식' 컬럼 1년 게재
'정은실의 테마가 있는 여행스케치' 컬럼2년 게재
'정은실의 스토리가 있는 고전음악감상' 게재 중
퀸즈식물원 이사, 퀸즈 YWCA 강사, 미동부한인문인협회회원,미주한국소설가협회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소설가협회회원, KALA 회원
뉴욕일보 고정 컬럼니스트
